Blahzone: 감정의 사각지대
1장 - 흐릿해지는 경계
안개가 자욱한 회색빛 세상이 펼쳐졌다. 바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고요했고, 빛이라고 하기엔 너무 희미한 빛줄기가 허공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Blahzone',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이 사라지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정체성이 흔들리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지는 이곳은 사람들 사이에서 금기의 땅으로 불렸다. 하지만 주인공 리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억이 리아를 괴롭혔다. 애초에 그녀의 소중한 사람, 동생 에단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조차 또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하나, 기억 속 마지막 장면은 에단이 이곳에 들어가며 속삭인 말이었다.
"Blahzone에서는 진짜를 잃으면 안 돼."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리아는 에단을 되찾기 위해 무작정 Blahzone의 경계선을 넘었다.
낯선 시작
리아가 Blahzone에 발을 들이자마자 공기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감각이 피부를 감싸더니, 무언가가 스며드는 듯했다. 기억의 흐릿함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에단의 얼굴만큼은 흐려지지 않게 붙잡으려 애썼다.
그녀가 걷던 길은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되었다. 벽에는 익숙한 듯 낯선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떤 것들은 그녀의 기억 속 한 조각 같았고, 또 어떤 것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에단!" 리아는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빨아들인 듯 공중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벽에 새겨진 희미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의 조각을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흐릿해진다."
이 글귀를 읽는 순간 리아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Blahzone에 발을 들인 이유, 에단을 찾으려는 목적조차 잊어버리기 직전이었다.
"안 돼, 잊을 순 없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만남
복도의 끝에서 리아는 이상한 남자를 마주쳤다. 그는 반쯤 사라진 듯한 형체로, 눈에는 감정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길을 찾으려면 조각을 찾아야 해."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각? 그게 뭐죠?" 리아는 숨죽이며 물었다.
"네 기억의 조각. 하지만 너의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 그 남자는 반쯤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리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남자의 말은 마치 이곳이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곳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잃게 되는 장소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설 수 없었다. 흐릿한 세상 속에서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서 그녀는 빛나는 조각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 한 조각, 에단과 함께 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하지만 조각에 손을 대는 순간, 귓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진짜를 잃지 마. 네가 잃는 순간, 너도 이곳의 일부가 된다."
리아는 한순간 망설였지만, 결국 조각을 붙잡았다. 조각 속 에단의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어. 나를 찾아줘."
리아는 이 모든 것의 답을 찾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흐릿한 경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지키며, 동시에 에단을 되찾아야만 했다. Blahzone은 그녀를 점점 더 깊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리아는 손에 쥔 조각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 에단과 웃으며 뛰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 따뜻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던 그 순간. 조각은 희미하게 빛을 냈다가 이내 그녀의 손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뜨겁게 뛰었다.
"에단… 널 찾을 거야."
그녀는 조각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에단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주위가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은 금이 가며 변형되고, 복도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꿨다.
"도망칠 곳이 없으면, 스스로를 잃게 돼."
그녀와 처음 마주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한 조각을 얻었지만, 또 다른 무언가를 잃었다."
리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리 한구석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 보려 했지만, 글자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내 이름조차…"
흔적을 쫓다
길이 변형되며 무작위로 생겨난 방 한가운데로 들어선 리아는 그곳에서 금속처럼 빛나는 커다란 문을 발견했다. 문 위에는 "다음 조각을 원한다면, 대가를 치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리아는 고민했다. 그녀가 가진 것은 많지 않았고, 여기서 잃는 것은 곧 자신이었다.
"대가를 치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문이 열리자, 그녀는 공간 안에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장면이었다. 에단과 함께했던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가 에단에게 따뜻한 코트를 벗어주던 순간.
"에단!" 리아는 소리쳤다. 그녀는 무작정 기억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방이 흔들리며 주변이 무너져 내렸다.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졌고, 리아는 그 조각들 중 하나를 간신히 붙잡았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 조각은 분명 에단의 기억일 텐데, 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걸까?
과거와의 충돌
리아는 조각 속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에단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그곳은 Blahzone과 비슷하지만 더 어두운 분위기였다. 에단은 두려움에 떨면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가 날 찾으면 안 돼… 그녀도 위험해질 거야."
리아는 충격에 휘청였다.
"무슨 소리야? 에단, 내가 널 찾으러 왔는데…"
그 순간, 리아는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돌아섰다. 이전에 만났던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의 몸이 거의 투명해져 있었다.
"네가 붙잡은 기억은 에단의 일부지만, 동시에 네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기도 해."
그는 웃음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진실을 찾으려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할 거야. 그게 아니면… Blahzone이 널 집어삼키겠지."
리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에단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돌아갈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또 다른 의문을 남겼다.
"희생이라니, 무슨 희생을 말하는 거지?"
결단의 순간
리아는 결코 돌아서지 않을 결심을 하며 다음 기억을 쫓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점점 잊혀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조차 희미해져 갔다.
Blahzone의 끝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리아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진짜를 잃는 순간, 자신도 이곳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