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잃어버린 감정의 무게
리아는 또다시 길 없는 길을 걸었다. Blahzone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고, 그녀의 심장은 느려지는 것만 같았다. 점점 더 흐릿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기 위해, 그녀는 손바닥을 바라보며 자신이 붙잡은 조각을 떠올렸다. 조각 속 에단의 모습과 속삭임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의지를 다잡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에단이 왜 나를 찾지 말라고 한 걸까?"
그녀는 의문을 품은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엔 방과 방을 연결하는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그녀가 익숙한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감정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
리아는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감정의 시험
문 너머는 환하게 빛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어렸을 적 리아와 에단이 함께했던 장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따뜻한 여름날, 둘이 함께 만든 모래성, 그리고 별이 쏟아지던 밤하늘 아래 속삭였던 약속.
리아는 그 장면들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장면이 깨지더니, 그 자리에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감정들은 너를 옭아맬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버리겠는가?"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 감정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버릴 수 없어."
그러자 공간이 어두워지며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리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였다. 하지만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너라면, 버릴 거야. 감정은 Blahzone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해가 될 뿐이야."
그 그림자는 리아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넌 에단을 찾는다고 하지만, 정말 기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네가 왜 그를 구하려는지."
리아는 그림자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곧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에단은 내 동생이야. 그를 찾고 싶다는 마음, 그건 진짜야. 그게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어."
깨어진 기억
그림자는 리아를 시험하려는 듯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다면 기억해봐. 이 조각들은 무엇이었는지."
리아는 자신이 모은 두 조각을 꺼내들었다. 첫 번째 조각은 에단이 Blahzone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순간, 두 번째 조각은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그런데 조각들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넌 진실을 원하는가, 아니면 그저 안도감을 찾고 싶은가?"
통증 속에서 리아는 떠오르는 새로운 기억을 마주했다. 그것은 오래된 가족 사진처럼 낡고 어색한 기억이었다. 어린 리아가 에단과 놀고 있는 장면 뒤편에서, 어른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단은 특별하다. 그가 위험해지면 리아도 위험해질 수 있어."
리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선명해지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에단이 Blahzone에 들어간 이유는 단순한 실종이나 사고가 아니었다. 그 뒤에는 무언가 더 깊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
길의 끝에서
리아는 마지막 문 앞에 도달했다. 이번 문은 이전과 달리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고, 문 위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가슴 속 깊이 불길함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면… 돌아갈 수 있을까?"
리아는 문을 밀어 열었다.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는 에단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낯설었다. 에단은 리아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넌 결국 왔구나."
리아는 놀라 멈춰 섰다.
"에단… 너를 찾으러 왔어."
그의 대답은 리아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널 데려오기 위해 내가 여기 왔던 거야."
리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이 흔들리며 에단의 모습이 점점 Blahzone의 일부처럼 변해갔다.
리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가 모은 기억의 조각들로 에단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녀 또한 Blahzone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인가?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아." 그녀는 손에 든 조각들을 꽉 쥐고 에단을 향해 다가갔다.
Blahzone은 그녀를 점점 더 깊이 끌어들이며, 최후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는 모아둔 조각들을 손에 들고 천천히 에단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주위는 불투명한 안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에단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감정이 없는 듯했지만, 깊은 슬픔과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왜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리아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에단의 눈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에단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난 너를 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넌 나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진실의 조각
리아는 에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손에 든 조각들을 들여다보았다. 그것들은 이제 단순히 기억이 아니었다. 조각마다 다른 색과 온기를 띠며, 그녀의 심장을 향해 무언가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조각은 에단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두 번째 조각은 에단이 낯선 사람들과 있는 장면.
그리고 세 번째 조각, 그녀가 방금 붙잡은 마지막 조각에는 에단이 홀로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포기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넌 무엇을 포기한 거야, 에단?" 그녀가 묻자, 에단의 모습이 일렁이듯 흔들렸다.
"여기 Blahzone은 단순히 기억을 잃게 만드는 곳이 아니야. 감정과 정체성을 시험하고,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을 묻게 하지. 난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내 기억과 감정을 댓가로 내놓았어."
리아는 멍해졌다. 에단이 기억을 잃은 이유가 그녀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 한구석에서 뜨거운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넌 나를 구하려고 스스로를 잃었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단은 작게 미소 지었다.
"넌 항상 나보다 강했어. 난 그걸 믿었어."
선택의 순간
리아는 자신이 붙잡은 조각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했다. 조각을 통해 에단의 기억을 되돌릴 수는 있지만, 대신 그녀의 감정과 기억 일부를 내놓아야 했다. 반대로, 그녀가 에단을 떠나 Blahzone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녀의 기억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에단은 이곳에 갇히게 된다.
그 순간, 방 한가운데에 거울처럼 투명한 표면이 나타났다. 표면에는 그녀와 에단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글자가 떠올랐다.
"구하려면 대가를 치러라. 잃지 않으려면 떠나라."
리아는 손에 든 조각을 바라보며 갈등했다. 이 모든 여정을 통해 그녀는 에단을 구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잃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에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넌 여기서 나를 떠나야 해. 그래야 네가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어."
리아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떠나라고 해도 난 너를 포기할 수 없어. 네가 날 위해 희생했듯, 나도 그럴 거야."
희생과 구원
리아는 조각들을 하나씩 거울에 가져다 댔다. 조각이 닿을 때마다 주변은 밝은 빛으로 물들었고,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에단과의 기억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녀는 손에 남은 마지막 조각을 거울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네가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면, 나도 너를 위해 내 모든 것을 줄게."
거울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산산이 깨져버렸다. 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에단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리아의 기억 속에서 에단과 관련된 모든 장면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에단의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
에단은 마침내 완전한 모습으로 리아의 앞에 섰다. 하지만 리아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문만 가득했다.
에단은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내가 기억해. 그리고 그걸로 충분해."
리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의 Blahzone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문턱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넌 누구든지 간에… 고마워." 리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돌아가자. 너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거야."
Blahzone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은 밝은 빛 속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리아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 공허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Blahzone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